아무도 아닌

🔖 양의 미래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이었다.

비정한 목격자.

보호가 필요한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은 어른.

나는 그게 되었다.


🔖 명실

그녀는 실리의 책들과 더불어 이 집에 남아 있었다. 수만 권의 책, 그걸 담은 선반. 그걸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그게 그녀의 등 뒤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매 순간 그 소리를 들었다. 흡족하게 그 소리를 들었다. 실리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그 책들 앞에 서서 그 이름들을, 그 이름들이 새겨진 책들을 골똘하게 노려보았다. 그게 실리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이까짓 것들. 엄청난 활자들, 이야기들, 실리의 이름이라고는 한 점 찾아볼 수도 없는, 아우성들. 실리는 그것을 읽으려고 자주 밤을 새웠고 그러고 나면 아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느 때 그녀는 실리가 그 책들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 장 한 장 실리가 죽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책장에서 날아오르는 각질들, 실리의 숨을 틀어막는 먼지들, 그런 것을 뿜어내며 형편없이 낡아가는 사물들. 그녀는 그 책들 위로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성냥을 던지고 싶었다. 그 이야기들에 이르는 이야기를 쓰지 못해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실리는 또 어땠나. 그까짓 것, 그까짓 것들이 실리를 죽였다.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어느 것도 펼쳐보지 않았다. 펼쳐보는 이 없으면 속수무책인 책들. 한 권도 버리지 않고 그 책들을, 그 책장을…… 닥치게 만들었고 죽게 내버려두었다.

이렇게 앉아서 몇 번의 겨울을 더 맞게 될까. 몇 번의 봄과 몇 번의 여름을. 그녀는 생각했다. 죽은 뒤에도 실리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난처한 상상인가. 얼마나 난처하고 허망한가. 허망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그녀는 노트에 만년필을 대고 잉크가 흐르기를 기다렸다. 제목을 적고 쉼표를 그리고 이름을 적었다.


🔖 웃는 남자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 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나가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그것을 생각해왔다.


🔖 복경

사람이 날 때부터 존귀하다면 그것을 스스로 알아채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학습되는 것입니까? 스스로 귀하다는 것은…… 자존, 존귀, 귀하다는 것은, 존, 그것은 존, 존나 귀하다는 의미입니까. 내가 존귀합니까. 나는 그냥 있었는데요 언제나 여기저기에 있었는데요. 이렇게 그냥 있어도 존귀할 수 있습니까. 존귀하다는 것, 그것은…… 아무래도 상태는 아니지 않아? 정태靜態가 아니고 동태動態가 아닙니까? 가만히 있어도 존나 귀하다면 그것은 일단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냥 있는 것 자체로 존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인간에 속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요. 왜냐하면 인간은 똥을 싸는 데에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생물이니까 병원비도 생활비도 벌어야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은 어떻습니까. 괜찮습니까. 자존하고 있습니까 제대로……. 존귀합니까. 존나 귀합니까…… 누구에게 그것을 배웠습니까.

나는 웃는 인간입니다.

언제나 웃고 있습니다.